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패트릭 유잉 (문단 편집) ==== 뉴욕의 왕 ==== 1988-89 시즌이 다가오면서 닉스는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게 된다. 그전까지 닉스를 지탱해왔던 기둥 중 하나인 빌 카트라이트를 트레이드하기로 한 것이다. 닉스 구단은 노쇠화를 보이면서 이제 유잉에게도 밀려나버린 후보 센터 대신 주전 센터인 유잉을 보좌하면서 그의 수비 부담을 덜어줄만한 블루워커 보디가드[* 당시 NBA의 골밑은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치열한 육체적 충돌의 경합무대였다. 때문에 1대1 포스트업이나 페네트레이션으로 상대 골밑을 파고드는 상대에 대한 견제가 거의 폭력에 가까웠다. 그래서 대부분의 팀들은 에이스와 팀원을 보호하고, 상대방과의 충돌에서 거칠게 밀어붙이는 선수들을 한 두명씩 꼭 갖고 있었다. 이런 선수들은 수시로 주먹다짐이 벌어지던 80년대 NBA에서 팀간의 충돌이 생길 경우 에이스를 등 뒤에 보호하고 선빵(...)을 날리거나 몸빵(...)을 하는 말 그대로 보디가드 역할을 수행했다. 팀원이 전부 갱스터 분위기였던 디트로이트를 제외하면. 찰스 오클리는 이런 리더쉽이 강한 블루워커의 표본과도 같은 선수였다.]를 물색하던 중, 닉스는 시카고 불스의 찰스 오클리와 빌 카트라이트의 맞트레이드를 성공시킨다. 찰스 오클리는 당시 어린 팀이던 시카고 불스에서 군기반장이자 조던의 보디가드 역할을 맡고 있었으며, 실제로도 조던의 매우 가까운 친구였다. 때문에 당시 시카고 불스가 피스톤즈 배드 보이즈의 조던 룰이라 불리는 집단 다구리에서 조던을 보호하던 찰스 오클리 대신 카트라이트를 영입하기로 하자 조던의 분노는 극에 달했으며, 빌 카트라이트는 나이도 새파란 에이스의 분노를 한 몸에 받느라 죽을 고생(...)을 했다. 실제로 조던이 카트라이트를 진정한 팀원으로 받아들이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참고로 오클리는 조던이 위저즈로 복귀했을 때도 먼저 영입을 주도할만큼 친한 사이이며, 구단주인 현재도 사석에 조던이 나타날 때면 늘상 함께 다니는 사이일 정도. 물론, 불스가 이 트레이드를 한 이유는 센터 빌 카트라이트에 대한 필요도 있었지만, 87~88년 1라운드 전체 10번으로 지명한 클렘슨대학교의 파워 포워드 '''[[호레이스 그랜트]]'''를 주전으로 올리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랜트는 구단의 기대대로 불스 첫번째 3연패 왕조의 넘버3로 대활약했다. 사실 선수 개개인의 실력만 따지면 전성기 기준 그랜트와 오클리는 비슷하거나, 골밑에서 더 터프하고 중거리슛 능력도 그랜트에 근접한 오클리가 더 가치가 있었지만 이 트래이드로 불스는 7-1이란 좋은 신장에 골밑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 센터 빌 카트라이트를 구했다는 게 신의 한 수였다. 만약 오클리와 그랜트를 둘 다 데리고 있었다면, 둘 다 센터를 소화하기 힘든만큼 당시 기준으로 훨씬 더 뛰어난 오클리를 중용해야했고 결국 그랜트란 유망주는 꽃피우지 못했을 것이다. 반면 닉스의 경우 유잉-카트라이트 트윈타워는 둘 다 순수센터에 가깝고 기동력도 그렇게까지 좋진 못해(트윈타워는 적어도 둘 중 하나가 포워드급 기동력을 갖고 있어야 효용성이 있다) 생각보다 효율이 떨어지던 걸 파워 포워드 오클리와 바꾸면서 한 단계 성장할 수 있었다. 결국 윈윈 트레이드. 어쨌더나 이 트레이드를 통해 닉스는 앞으로 팀의 중심은 유잉이며, 그를 통해 우승을 일궈낼 것임을 천명한 셈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시즌에서 닉스는 그야말로 파죽지세의 기세를 보여주었다. 바클리가 이끌던 필라델피아와 버드가 이끄는 보스턴을 제치고 52승 30패라는, 전년도에 비해 파격적으로 상승한 승률로 애틀랜틱 디비전 타이틀을 거머쥔 것이다.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고 만난 필라델피아를 3-0으로 스윕하면서 기대감을 높이던 닉스는 2라운드에서 조던이 이끄는 시카고 불스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홈코트 어드밴티지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닉스는 시카고에게 2승 4패로 탈락,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 진출권을 빼앗기고 유잉은 대학 시절의 아픈 기억을 곱씹으며 다음 해를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것이 지긋지긋한 유잉과 닉스의 조던에 대한 악연의 시작점에 불과한 것을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다음 시즌, 닉스는 스투 잭슨을 코치로 맞아 새로운 체제를 정비하게 된다. 이 해에 유잉은 개인으로서 최고의 성적을 올리게 되는데, 전 경기인 82경기를 출장하면서 28.6득점 10.9리바운드 4블록이라는 경이로운 성적을 기록하게 된 것이다. 덕분에 유잉은 처음으로 올-NBA 퍼스트 팀에 선정되는 경사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팀은 전년대비 하락한 승수에 머무르고 말았고, 진출한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강팀 보스턴 셀틱스를 무찔렀음에도 불구하고, 2라운드에서 전년도 우승팀인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게 1승 4패의 성적으로 패퇴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해에도 닉스는 유잉의 분전에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플레이오프에서는 당시 첫 우승을 향해 달려가던 조던의 시카고 불스에게 3패로 스윕을 당하면서 시즌을 마감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